윤형근, 무제(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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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무제(1974)

공동구매 목표금액

16,000,000원

공동구매 달성액

16,000,000원

공동구매 진행률

100 %



가슴 아픈 한국의 역사가 낳은 예술가, 윤형근




<공동구매가 종료되었습니다>



윤형근, 무제, 1974, 종이에 유채, 60.0 x 44.6 cm


윤형근 화백의 ‘무제’는 1974년도의 종이에 유채로 그린 작품으로, 친한 지인의 자제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경의 삶을 살아온 윤형근 화백은 1973년 이후, 대부분 작품에서 어두운 흑색에 가까운 색감의 작업을 하였는데, 이번 동구매 작품 ‘무제’는 특이하게도 다소 밝은 색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에서 그 동안의 응어리를 잠시 내려 놓고, 푸른 색감의 올곧은 선을 그어 냈을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잔잔한 감동이 전해져 옵니다. 제주도의 에머랄드 빛 바다를 연상케 하는 윤형근 화백의 ‘무제’, 보는 이에게 마음의 평온을 선사하며 작품의 희소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작품세계



내 그림 명제(命題)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엠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天地)라 했고, (내 그림의) 구도(構圖)는 문(門)이다.”



-윤형근, 1977년1월 일기 中





윤형근 화백의 작품에서 블루는 하늘, 엄버는 땅을 상징합니다. 땅의 색인 갈색(Burnt Umber)과 하늘의 색인 청색(Ultramarine)을 혼용하여 오묘한 먹빛의 물감을 만들고, 기름과 함께 거친 마포나 면포에 죽죽 그어 내립니다. 반복적으로 그어 놓은 선들은 스며들고 번지면서 먹빛의 넓은 기둥이 되고, 여백과 대비되는 관계 속에서 심오하고 강렬한 힘을 내포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을 천지문(天地門)이라 명명했듯이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공간은 문이 되고,색이 칠해진 어두운 공간은 문의 기둥이 되어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기도, 구분해주기도 합니다.

윤형근 화백은 1970년대에 장인이자 예술적 스승인 김환기의 전면점화의 특색 중 한지에 물감이 스며들어 번지는 번짐 효과에서 영감을 얻어 이후 작품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소박한 질감, 널찍한 여백, 색채의 은은한 번짐, 흑과 백의 강한 대비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한국적 미감과 정서를 대변하는 멋과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에 존재하는 번짐은 단순히 메워진 공간과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메워짐과 비어있음이 동일한 공간에서 존재할 수 있음을 표현함에 따라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한편, 화면을 물들인 짙고 어두운 색은 나무나 흙, 돌 같은 모든 생명의 기반이 되면서 결국엔 모든 생명체가 죽어서 돌아가는 색으로 결국 윤형근 화백은 자연주의적이면서도 무작위적인 표현을 통해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 화백이 꿈꾸던 길을 함께 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은 늘 보아도 소박하고, 신선하고, 아름답다. 나의 작업도 그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신선한 세계를 지닐 수 없을까. 그것은 어려운 것, 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자연과 같이 늘 보아도 물리지 않는 아름다운 작품을 그리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원이다."








작가의 생애



"나는 그 좋아야 했던 20대 청춘을 악몽 속에서 지냈다. 그래서 다사롭고 고운 색채가 잠깐 사이에 사라지고 어둡고 살거운 빛깔로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따라 그 생(生)의 자세가 다르기 마련이다. 나는 무엇이고 옳지 못한 것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 화가 난다. 협잡성을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편리한 쪽에서 양지(陽地)쪽에서 사는 놈들을 보면 화가 난다. 비겁한 놈들이다. 왜 정정당당히 살지 못할까.(중략)"



-영숙 생일날 밤에 형근, 1986년 9월19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독재정권을 겪은 그의 삶은 가슴 아픈 한국의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태어난 윤형근 화백은 만 17세가 되던 해인 1945년에 조국의 해방을 맞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금 후 1949년에 제적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학창시절 시위 전력으로 무고하게 보도연맹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10여년 간을 미군부대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을 하던 윤형근 화백은 서울대학교 재학시절 주임교수였던 김환기의 도움으로 1955년에 홍익대학교 서양학과에 편입하여1957년 서른 살에 겨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또 한 번의 위기를 직면하게 되었는데, 1956년 전쟁 중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어 1심에서 5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간신히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후 윤형근 화백은 1960년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하여 김환기의 사위가 되는데, 청첩장이 전달되어 열어보니 자신의 이름과 김환기 화백의 장녀 이름이 쓰여 있었더라는 일화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1961년,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로 접어들 것으로 기대했으나, 1973년 다시 한 번 시련을 겪게 됩니다.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중앙정보부장의 자금을 대고 있던 재벌 기업의 딸 부정 입학을 거부하고 교장에게 이의를 제기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반공법 위반 사유는 작업할 때 쓰던 베레모가 사회주의자 레닌의 것과 유사하다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죄명을 뒤집어쓴 채 결국 또 한번의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세 번의 복역과 한 번의 죽을 고비를 경험한 그는 그 이후의 생을 ‘덤’ 이라고 일컬었습니다. 1973년 이후 그는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삼키며 약 10여 년간 작품 활동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수 많은 대작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80년 5월 발생한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광주시민이 무참히 학살되는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은 윤형근 화백은 착잡한 마음을 부여잡고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 역사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며, 죽음의 기로 앞에서도 올곧은 양심과 정직함으로 맞선 그를 우리는 한국의 역사가 낳은 참된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 감정서






목표 보유기간: 1년

목표 수익률(IRR): 보유기간 내 15%


회사는 공동구매자로부터 작품 별로 관리 및 판매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아 목표 보유기간 내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는 경우 작품의 판매를 진행하며, 

목표 보유기간 내 목표 수익률 달성이 어려운 경우 공동소유권자의 동의를 얻어 보유기간 연장 및 즉시 판매를 진행하게 됩니다.








1. 작품확인서






- 공동소유권 1개마다 작품확인서 1장을 제공

- 초고해상도이미지를 최고급 용지에 특수인쇄

- 개인적인 감상 및 인테리어 목적으로 사용

- 액자 주문제작 가능 (비용별도 2만5천원)

- 회사에 반납하는 경우 :  a. 공동소유권 거래시 b. 원작품 판매시


 


2. 프라이빗 라운지 이용



동반 1인 이용가능

프라이빗 라운지 운영시간

-  월화수: 11시 ~ 6시

- 목금: 11시 ~ 8시

- 주말, 공휴일 휴무